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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강항선생 400 + 1주념 일본 위령제헤이세이(平成)시대 마감하고 레이와(令和)시대 원년으로 민간차원의 한일관계개선에 집중
아시아씨이뉴스 | 승인2020.04.10 14:53

수은강항선생(睡 姜沆先生)과 일본

전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수은강항선생 일대기’를 재정리해 402년 전의 그 의미를 더 해 본다.

1597년 강항이 포로로 끌려 가 참혹한 전쟁의 참화(慘禍)속에 극적으로 수용하게 된 왜(倭)의 제자와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당시 왜(倭)에 유교를 뿌리내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일대기를 통해 “수은강항선생(睡隠 姜沆先生)과 일본”의 민낯을 고스란히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전하고자 한다.

이미 ‘수은강항선생 일대기’(이하 일대기)는 2014년 5월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가 재 창립되면서 준비되었다.

마침내 2019년 전라남도교육청의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 지원 보조금으로 저술(著述)되었으며 전국 판매망에 내 놓을 수 있는 추가도서는 진주강씨중앙종회 강창근회장의 일천 만원의 기부와 진주강씨 현종들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정, 관계에서 많은 분들이 축간사를 보내와 일대기 책자의 소중함을 인식하는데 더 할 나위 없이 기쁜 축복이었으나 정운찬 전 국무총리의 축간사는 이 시대에 이 책이 집필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짚어줌으로써 다시 한 번 더 게재해 함께 공감해 보고자 한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 KBO

<격려사>

일본 성리학(性理學)의 시조(始祖)
유학자 수은(睡隱) 강항(姜沆) 1)

정운찬 국무총리(전), KBO총재

요즘 일본과의 관계가 매우 껄끄럽다. 이러한 시기에 오백여 년 전 정유재란 때 포로로 잡혀가 일본의 실상과 전란에 대비해야 할 국내 정책 등의 내용을 담은 『간양록(看羊錄)』을 쓴 강항 선생의 전기(傳記)가 출판된 것을 환영한다. 대일본 관계 악화에 대한 대책도 없이 갈팡질팡하는 정부를 보면서 이 전기는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의 일생과 『간양록』

『간양록』은 ‘내가 겪은 정유재란(涉亂事述)’, ‘적국에서 올린 상소(賊中封疏)’, ‘내가 듣고 본 적국 일본(賊中聞見錄)’, ‘귀국하여 임금께 올린 글(詣承政院啓辭)’, 제자 윤순거가 쓴 발문 등으로 이루어졌다.

적국 일본의 다양한 사정과 현실을 기록하고 장차 국방을 비롯한 조선의 국가 정책에 관한 견해도 펼쳤다. 예컨대 ‘전하께서는 장수 하나를 내실 때에도 신중히 생각하셔서 문관이든 무관이든 국한하지 마시고, 품계와 격식으로 예를 삼지도 마시고, 고루한 신의와 사소한 덕행도 묻지 마시고, 이름난 가문을 택하지도 마소서’라고 인재 기용에 대한 절절한 안타까움과 소망을 토로한다. 통상을 중시하여 대외 교역이 활발한 일본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하기도 한다.

(이 글은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 강대의 선생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것이다.)

“왜인들의 성질이 신기한 것을 좋아하고 다른 나라와 통교하는 것을 좋아하여 멀리 떨어진 외국과 통상하는 것을 훌륭한 일로 여깁니다. 외국 상선이 와도 반드시 사신 행차라고 합니다.

교토에서는 남만 사신이 왔다고 왁자하게 전하는 소리를 거의 날마다 들을 수 있으니, 나라 안이 떠들썩한 이야깃거리로 삼습니다. … 먼 데서 온 외국인을 왜졸(倭卒)이 해치기라도 하면 그들과의 통교가 끊어질까 염려하여 반드시 가해자의 삼족을 멸한다 합니다. 천축 같은 나라도 매우 멀지만 왜들의 내왕이 끊임이 없습니다.”

– 『간양록』의 ‘귀국하여 임금께 올린 글’ 중에서

『간양록』에서 ‘간양’(看羊)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양을 돌본다.’는 뜻이다. 이는 중국 한나라 무제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흉노왕의 회유를 거부하고 양을 치는 노역을 하다가 19년 만에 돌아온 소무(蘇武)의 충절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강항 자신이 붙인 본래 제목은 『건거록(巾車錄)』이었다. ‘건차, 건거(巾車)’는 죄인을 태우는 수레이니 적군에 사로잡혀 끌려가 생명을 부지한 자신을 죄인으로 자처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강항이 세상을 떠난 뒤인 1654년에 그의 제자들이 책을 펴내면서 스승을 한나라의 소무에 견주어 제목을 『간양록』으로 바꿨다.

강항은 1567년 전남 영광에서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의 5대손으로 태어났으며,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이다. 성리학(性理學)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성혼(成渾)의 문인(門人)이며, 일곱 살 때 『맹자』 7권 한질을 암송한 천재이기도 했다.

1588년에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교서관박사·전적을 거쳐 1596년 공조·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남원 일대에서 군량 운반을 관리했다.

그러나 남원성을 포위한 왜군 병력은 5만이 넘었고 남원성을 지키는 조선군은 1천여 명, 명나라 원군이 3천여 명이었다. 남원성이 사흘 만에 함락되면서 이광정과 명나라 양총병(楊摠兵)은 도망치고, 조선군과 명나라 원군은 전멸했다. 왜군은 성 안의 백성들을 무참하게 살육했다.

남원이 함락된 뒤 고향 영광으로 돌아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다. 왜군의 기세 앞에 영광도 함락 당했다. 강항은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려고 두 형과 집안 식솔들을 배에 태워 이순신 진영으로 향했지만 사공의 잘못으로 뱃길이 어긋나는 바람에 1657년 9월 23일 영광 인근의 논잠포 바다에서 왜의 수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강항은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그때 어린 딸과 아들이 물에 빠져 죽는 참화를 겪게 되었다. 많은 식솔들도 왜군의 칼에 죽임을 당했다.

포로로 잡힌 강항과 식솔들은 부산 근처의 안골포를 거쳐 대마도, 그리고 일본 침략군의 출발 기지인 큐슈 서북단의 나고야와 시모노세키를 지나 시코쿠(四國) 지방 이요(伊豫)의 오즈(大洲, 현재의 에히메현 오즈시)성으로 끌려갔다. 오즈는 강항 일가족을 사로잡은 왜의 장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영지였다. 강항은 오즈 억류 생활 9개월에 두 번의 도주를 감행하나 실패했다.

오즈의 영주인 도도 다카토라는 강항 일가족을 오즈에서 오사카를 거쳐, 1598년 교코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했다. 후시미는 당시 일본의 수도였다. 이곳에서 2년 남짓 지내면서 선비 강항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교토에 온 뒤로 왜국 실정을 알기 위해 왜승들과 교제하면서, 학식 높은 승려들에게 유학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면서 강항은 일본의 지리와 군사시설을 비롯한 내부 적정(敵情)을 세밀히 적은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을 조선조정으로 보내 참조토록 했다.

강항이 세운 일본성리학의 근대일본 디자인화

그때 만난 학승(學僧)이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 1561~1619)인데, 일본 성리학의 기틀을 닦은 인재였다. 후지와라 세이카를 일본 성리학의 개조(開祖)로 평가하는데, 그에게 주자학(朱子學)의 깊은 학리(學理)를 가르쳐준 스승이 강항이다.

『한국인명대사전』에는 강항을 일본 성리학의 시조(始祖)로 표현되어 있다. 후지와라 세이카의 의뢰를 받아 강항은 『사서오경(四書五經)』 대자본(大字本)을 정서(淨書)하고, 수진본(袖珍本 : 옷소매에 넣을 수 있는 소책자)으로 대학·중용·논어·맹자·시경·예기·춘추·역경·곡례전경(曲禮全經)의 오경·소학·근사록(近思錄)·근사속록·통서·정몽(正蒙) 등 16종을 필사했다.

수진본 16종을 수록한 『강항휘초(姜沆彙抄)』는 현재 일본 왕궁의 국립공문서 관내 내각문고에 보전되어 있으며, 강항의 서명이 뚜렷이 남아 있다.

일본에서 1991년과 2007년에 ‘일본에 유학을 전한 조선인’이라는 주제로 2권의 저서가 간행되었다. 이것만 보아도 강항의 가르침으로 후지하라 세이카가 사서오경왜훈본(四書五經倭訓本)과 주자신주(朱子新注)의 훈점본(訓點本)을 완성함으로써 유교와 성리학의 기틀을 세우고 그 문호를 넓혔으니, 결과적으로는 강항 선생이 일본에 전한 성리학이 일본의 근대화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강항을 통해 일본 땅에 뿌려진 성리학은 일본 학문이 번영하게 된 뿌리가 됐다. 일본 학문에 다양성을 더했고 일본인들이 쉽게 학문세계에 접할 수 있게끔 했다. 일본인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근대화과정에서 대단한 원동력이 됐다. 결국 강항이 전수한 성리학의 진수와 학문에의 용이한 접근성은 일본을 강대국으로 만드는 정신적 원천이 됐다.

강항과 후지하라 세이카는 일본 성리학을 발전시켰고 일본성리학은 일본인들이 세상의 이치를 논하고 분석하는 ‘학문 원형질’이 됐다. 일본학자들은 서양학문의 여러 가지 개념을 한자로 정리했다. 서양학문에 대한 동양적 개념화는 대부분 일본 학자들이 일궈낸 성과다.

이 성과의 이면에는 사유와 분석을 통해 물질과 사상세계를 체계화시켰던 성리학이 있다.

일본학자들은 학문적 지식을 산업과 농업을 발전시키는 데 사용했다. 일본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됐다.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단련된 일본인들의 내공은 결국 난학(蘭學:서양학문)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케 했다. 일본이 흥하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

강항선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 작업은 한국에서보다는 일본에서 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1989년 일본의 NHK 텔레비전에서 45분 동안 방송된 ‘유자(儒子) 강항과 일본’이라는 특집 프로는 강항을 일본과 한국에 알리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1990년 강항이 억류생활을 했던 에히메현 오즈시 중심가 시민회관 앞에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유학자 강항’이라고 새겨진 ‘홍유 강항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를 세우고, 일본인들이 강항 선생을 흠모하고 있는 것은 근대 일본 발전에 대한 기여도 때문이다. 한편 강항의 고향인 영광군과 오즈시는 2001년부터 교류하고 있다.

강항의 귀국과 후학 양성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후지하라 세이카 등의 도움으로 강항과 가족 등 38명은 1600년 후시미성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강항일행은 대마도를 거쳐 부산에 도착했다. 강항이 조선에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조는 강항을 불렀다. 강항은 입궁하여, 선조를 만나 일본의 사정을 알렸다. 이후 한양에 머물면서 승정원과 예조, 비변사 등에 일본의 여러 상황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알렸다.

9월 초에 강항은 고향인 영광군 유봉마을에 돌아와 부친 강극검을 만나 상봉의 기쁨을 나눴다.

1602년 대구교수(大邱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곧 사직했으며, 1608년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대신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인물화와 소나무를 그리는 재주도 뛰어났다. 그러나 선생은 1618년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저서로 『운제록 雲堤錄』·『강감회요 綱鑑會要』·『좌씨정화 左氏精華』·『간양록 간양록』·『문선찬주 文選纂註』·『수은집 睡隱集』 등이 있다. 일본 내각문고(內閣文庫)에 『강항휘초 姜沆彙抄』가 소장돼 있다. 그밖에 『문장달덕록(文章達德錄)』과 동양문고 소장본 『역대명의전략(歷代名醫傳略)』의 서문을 썼다.

1882년 이조판서(吏曹判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됐으며, 영광 1635년 내산서원 용계사에 제향 됐다. 일본의 효고현(兵庫縣)에 있는 류노(龍野) 성주 아카마쓰(赤松廣通)기념비에도 이름이 새겨져 있다.

광복 후 강항 선생 후손과 학자들에 의해 강항선생을 기리는 선양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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