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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독립선언의 성지 ‘재일본한국 YMCA회관’을 찾아서
아시아씨이뉴스 | 승인2019.01.10 12:06

3·1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던 2·8독립 선언 선포일(1919년 2월 8일)이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이한다.

'2·8독립선언'은 재일본조선인유학생들이 적국의 심장부인 동경 한복판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선포한 날이다. 참여한 유학생 600여 명 중 359명은 같은 달 국내로 잠입, 전국 각지로 흩어져 3·1운동을 조직·결행하고 전국적인 3·1독립만세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 2·8 독립선언의 태동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자 한국의 의병 열사들은 일본의 부당한 침략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조선총독부의 가혹한 탄압에 한국의 지도자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 무렵 일본 동경에는 조선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선기독교청년회, 조선유학생학우회, 조선학회, 조선여자친목회 등의 애국단체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잦은 모임을 가졌다. 수시로 웅변대회나 토론회 등을 개최하고, ‘학지광(學之光)’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했다.

이러한 와중에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W.)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발표하자 조선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을 호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러한 보도가 도쿄의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아사히신문에 실리자 유학생들은 크게 울분했다.

1919년 1월 6일, 재일본동경조선YMCA(현재 재일본한국 YMCA) 강당에 모여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일본 내각, 각국의 대사관 및 공사관에 청원할 것을 결의, 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 송계백(宋繼白) 전영택(田榮澤) 서춘(徐椿) 김도연(金度演) 백관수(白寬洙) 윤창석(尹昌錫) 이종근(李琮根) 김상덕(金尙德) 최근우(崔謹愚) 이광수(李光洙) 김철수(金喆壽) 등을 선출하였다.

선출된 실행위원들은 비밀 회합을 거듭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민족대회소집청원서 및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작성하였다. 조선청년독립단 송계백과 최근우를 국내에 밀파해 최린(崔麟) 송진우(宋鎭禹) 최남선(崔南善) 현상윤(玄相允) 등과 접촉하게 하여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청하였다.

◇ 2·8 독립선언

유학생들은 아침부터 재일본동경조선 YMCA 강당으로 모여들었고,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독립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천명한 독립선언서, 결의문, 민족대회 소집청원서 등을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하여 각국 대사관, 일본정부 요인, 귀족원, 중의원 양원의원, 조선총독부, 국내외언론기관, 잡지사 등에 우송하였다.

이날 오후 2시, YMCA 강당에서 조선유학생학우회 총회를 개최했다. 강당은 유학생 약 600여 명의 열기로 가득찼다. 일본경찰을 속이고 감시망을 피해 열린 이 총회는 곧바로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했고 독립단 대표 11명의 서명이 들어간 독립선언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백관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주창하자, 장내는 독립만세 소리와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독립선언식이 끝날 무렵, 동경 경시청에서 급파된 경찰대가 대회장을 포위하고 장내에 난입, 일제검거가 시작되었다.

조선의 유학생들과 일본경찰과의 몸싸움이 벌어졌고 실행위원 11명 중 9명이 체포당하고 2명이 탈출했다. 이에 유학생들은 도쿄 시민들이 많이 찾는 히비야공원에 재집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전원이 귀국할 것을 결의했다. 국내에 돌아와 전국 방방곡곡으로 흩어져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조직 결성, 3·1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대한민국의 독립선언과 주권회복을 외쳤던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은 ‘2·8독립선언’을 시발점으로 '3·1독립운동' 전개에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중국의 '5·4운동'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하는 결실로 이어졌다.

◇ 재일본한국 YMCA 회관

역사적인 ‘2‧8독립선언’의 현장이 되었던 YMCA 회관은 1906년 일본의 수도 동경에 설립, 동경 유학생들에게 웅지를 심어주고,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의해 폐쇄된 재일공사관을 대신해 조선유학생의 보호, 하숙집 제공, 일본어 교육, 진로 상담, 성경연구 등의 활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한일간에 국교가 없는 상태에서 재일동포를 위한 영사관의 역할을 감당했다.

또한 애국애족 정신을 바탕으로 각계 민족지도자를 육성하고 배출했으며 대일본사회의 각성을 일깨우는 기독교사회운동과 거족적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그 후로도 YMCA 는 2·8 독립선언의 유적지로써 흩어진 민족정신을 일깨워 우리민족 단결의 구심점이 되었고 관동대지진 때에는 동족을 구출하고 보호하는 피난처가 되었다.

지금도 이곳에 설치되어 있는 기념자료실에는 당시의 2‧8독립선언과 관련된 영상, 도서, 신문, 논문 등의 자료를 전시하여 유학생들의 의의를 되살리고 있다. 한국 유학생들의 집결지는 물론 70만 재일동포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주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 국가와 국민이 관심을 가져야 할 재일본한국 YMCA 회관

재일본한국YMCA 회관은 가혹한 식민지 통치 속에서,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거점이었다. 그런만큼 시련도 컸다.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의 본거지로써 탄압을 받아 해체의 위기를, 해방이 되자 쌓인 빚을 갚지 못해 경매의 위기를 겪었다. 온갖 시련 속에서도 지켜온 이 건물이 지금은 낡아 수리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을 맞고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어섰던 젊은 학도들의 열망과 숨결과 헌신이 서려있는 숭엄한 곳이다. 민족의 수난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민족의 성지이자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결코 외면해서는 안될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전해야 할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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